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리히 6세 (문단 편집) == 즉위 이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1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1세]]의 장남[* 실제로는 차남이나 장남 프리드리히가 유아기에 사망했다.]. 모후는 부르고뉴 백작의 외동딸로 백작령을 상속한 부르고뉴 여백작 베아트리스다. 1169년 아버지에 의해 5세의 나이로 황태자 지위인 [[로마 왕(신성 로마 제국)|독일왕]][* 실질적 독일의 통치자가 아닌 명예적 칭호이다. 선거제 국가인 신성로마제국에서 강한 황권을 가진 황제들이 생전 후계 확립을 위해 어린 자신의 아들을 선거를 통해 제후들의 동의를 얻어 미리 즉위시켰다. 동양 관점에서 보면 황태자 지위라 할 수 있다.]에 올랐다. 1184년 시칠리아 국왕 [[구기에르무 2세|굴리에모 2세]][* 프랑스식 이름은 기욤 2세로 당시 시칠리아는 노르만계인 오트빌 왕가가 지배했다.]의 고모였던 10살 연상 [[쿠스탄차 1세|쿠스탄차]][* 프랑스식 이름은 콘스탄스다.]와 혼인한다. 당시 이탈리아의 세력 구도는 황제파와 교황파가 수차례 대립하는 북부, 교황의 세력이 더 큰 중부, 노르만계 시칠리아 왕족이 지배하는 남부 이탈리아로 이루어져 있었다. 교황파의 강력한 반발로 이탈리아 평정의 뜻을 쉽사리 이루지 못했던 프리드리히 1세가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과 손을 잡아 남북으로 교황을 압박하려 한 것이다. 이 결혼의 또다른 의의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시칠리아 왕위에 대한 잠재적 상속권을 얻은 것이다. 굴리엘모 2세는 후손이 없었고 그대로 사망할 경우 쿠스탄차가 유일한 적법 후계자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1184년에는 황당한 사건을 겪었다. 일명 '''[[에어푸르트 변소 사고]]'''.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1189년 부황이 3차 [[십자군]] 원정을 위해 서아시아로 출정하자 제국의 통치를 맡았다. 아버지의 영원한 정적 [[하인리히 사자공]]이 부친의 부재를 틈타 반란을 일으켰으나 제압했다. 젊은 황태자는 이후 갑작스러운 상황에 직면한다. 11월에 시칠리아왕 굴리엘모 2세가 결국 후계자를 낳지 못하고 사망했고, 이듬해인 1190년에 부황 프리드리히 1세가 원정길 도중에 병사했다[* 고령의 나이에 물이 찬 강을 건너다 사망했다. 자나깨나 방심하지 말고 건강을 조심하자.].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5세, 젊은 나이에 제위와 시칠리아 왕위를 모두 계승하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